미당, 그는 누 구 인 가
『자화상』 (1941, 제 1시집 “화사집”)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기퍼도 오지않었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싶다 하였으나…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 밑에
손톱이 깜한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
번째시집 『귀촉도』가 간행되었다.
해방이 되자 서정주는, 문단에도 몰아닥친 이념과 정치적 선택의 기로에서 주저 없이 우익, 그중에서도 이승만 노선에 충실한 쪽으로 선회하였다. 이미 해방 직후부터 활발한 조직 활동과 문예 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던 좌익에 비해 여러 가지로 열세에 놓여 있
미당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에서 출생
생전에 15권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약 70년의 창작 활동기간 동안 1000여편의 시들을 발표
주요 작품
<자화상>, <귀촉도>, <국화 옆에서>, <동천> 등
그의 시는 뚜렷한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거치는데 초기의 원색적이고 강렬한 관능의 세계에서 출발하여 한
'이 연속 게재했던 『국화꽃의 비밀』이란 문제적 글은 '서정주 논쟁'에 네티즌들이 광범위하게 참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이 장에서는 현대시론3공통 다음 시집 중 한 권을 선택-서정주 시집-하여 읽고 아래 지시사항을 반영하여, 시집을 소개하는 글을 서간문 형식으로 작성하기로 하자
서정주의 화사는 그의 첫 시집 『화사집』에 실린 시로서 미당을 일컬어 ‘생명파’라 부르게 된 대표작이다. 그는 『현대조선시약사』에서도 밝혔듯이 『화사집』을 낼 당시 서정주의 관심사는 생명의 탐구와 이것의 집중적인 표현에 있었다. 이 같은 주제 구현의 배경에는 그 이전 한국 시단이 언어
1) 서정주徐廷柱 ( 1915.5.18~2000.12.24 ) 약력
본관은 달성達城, 호는 미당未堂이다. 1915년 5월 18일 전라북도 고창高敞에서 태어나 일곱 살 무렵까지 동네 서당에서 한문공부를 한 뒤 줄포 초등학교에 들어가 5-6학년 과정을 한해에 끝마쳤다. 부친의 극진한 성원에 힘입어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입학
미당(未堂 : 아직 성숙하지 않았다 / 아직 어린이 되지 않았다). 다츠시로 시즈오는 그의 창씨개명 시 이름. 일제시대 창씨개명해 근대교육을 받은 아버지 덕분에 비교적 유복하게 학문에 정진할 수 있었습니다. 마을에서 한학을 배우다 줄포공립보통학교 진학 후 졸업, 서울 중앙고등보통학교에 보결로
미당 논쟁’으로 일컫는 서정주의 친일문학과 관련된 문제제기들이 친일담론 중에서도 가장 문제적인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이런 판단의 갈림길을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시의 정부’, ‘백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한’ 시인, ‘이 나라 시인부족의 족장’ 등의 찬사가 아니더라도,
느러트린
병든 숫개만양 헐덕어리며 나는 왔다.
註. 此一篇昭和十二年丁丑歲仲秋作. 作者時年二十三也
실제로 시집에는 제목이 실려 있지 않기 때문에 위에 실은 시에도 제목을 삽입하지 않았다. 시 전체적으로 가장 문제가 되는 부분은 “애비는 종이었다”이다. 상당히 도발적이고 충
81. 즐거운 편지
<즐거운 편지>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 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 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 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